INTERVIEW 스위스 바젤(BASEL)에서는 타이포 그래피를 어떻게 배울까? 안진수 JINSU AHN바젤 디자인대학교THE BASEL SCHOOL OF DESIGN 교수 타이포그래피를 배우러 바젤로 간 계기는 무엇이었나요?1995년에 경북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 학과에 입학해서 보니 선배들은 다들 수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큰 포스터를 직접 그리거나 실크스크린으로 만드는 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죠. 그런데 1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가 복학하니까 그런 시설이 다 없어졌어요. 저는 수작업 기초도, 그렇다고 컴퓨터 기초도 없는 상태라 더 막막했고, 그저 눈앞의 학교 과제만 죽어라 하면서 나름대로 몸부림친 것 같아요. 뭔가 더 배우고 싶고, 알고 싶었어요. 감사하게도 은사님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 실력 부족으로 입학 논문 심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전부터도 그랬지만, 특히 입학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에밀 루더와 얀 치홀트의 타이포그래피를 깊이 들여다보며 내가 갈 길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특히 부모님께서 믿음과 용기를 주셔서 바로 바젤의 학교로 목표를 다시 잡았죠. 바젤에 자리 잡은 과정을 이야기해 주세요.2004년에 바젤의 학사 과정에 입학할 때만 해도 공부를 마치는 즉시 한국에 돌아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강의를 시작하고 싶었어요. 저 같은 학생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졸업하는 해에 공교롭게도 미국의 UIC와 협력해서 만든 석사 과정(현 International Master of Design UIC/HGK, 이하 MDes)이 생겼고, 2년만 더 고생하자는 마음으로 공부를 계속했어요. 2009년에, 석사 과정을 졸업할 때, 학교에서 조교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습니다. 제가 졸업한 석사 과정 외에 학교에서 독자적으로 두 번째 석사 과정(현 Master of Arts in Visual Communication and Iconic Research, 이하 MA)을 개설할 계획이 있었고, 시기가 잘 맞아떨어져서 그 계획의 일환으로 제가 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죠. 조교로 일하는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 와중에 2010년부터 석사 과정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필립 슈탐Philipp Stamm 교수와 함께 진행할 기회를 얻었고, 2014년에 정식으로 임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젤의 생활은 어떤가요?제게 바젤은 작고 아늑한 집 같다고 해야 할까요, 오래 입어 온 옷처럼 편안해요. 수업은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해서 오후 5시 정도에 끝납니다. 학생 수와 상황에 따라 길어질 때도 있지만, 최소한 가족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하거든요. 바젤은 구석구석 다양한 모습이 녹아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시내 어디든 자전거로 쉽게 닿을 수 있고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 박물관의 도시고, 중심부에 라인강이 운치 있게 흐르는가 하면 조금만 나가면 하이킹하기 좋은 산들도 많아요. 심지어는 제가 사는 동네 뒷산에서는 가물가물하지만, 알프스도 볼 수 있죠. 독일,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아 있어서 사람들 성향도 스위스 다른 지역보다 보수적이지 않은 편입니다. 바젤 디자인대학교를 소개해 주세요.우리 학교의 모체는 1796년에 만들어진 드로잉 학교입니다. 이 학교가 19세기 후반 바젤 일반 산업학교로 개편되었고, 이 학교가 1944년 산업과와 예술산업과로 세분되면서 예술 디자인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지요. 1980년에는 예술산업과가 바젤 디자인 학교로 독립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곧 디자인 예술 분야에서도 대학 수준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그 결과 1996년 바젤 디자인 학교로부터 바젤 디자인 대학이 떨어져 나오게 됐지요. 이 과정에서 에밀 루더, 아민 호프만, 볼프강 바인가르트, 페터 폰 악스 등 거장들이 학교의 토대를 확립해 왔습니다. 학교의 철학은 무엇인가요?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시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디자이너의 지식은 철저한 기초 교육 위에서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 학교의 토대를 이루는 것 같아요. 바젤의 기초 교육, 특히 학사 과정의 기초 교육은 눈과 손의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예요.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소통에 시각 커뮤니케이터로서 이바지할 수 있는 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합니다. 눈과 손의 훈련이란, 어떤 형태를 특정 스타일로 만들어 내는 기술적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소통하고자 하는 대상을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를 통해 이해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표현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의 인쇄를 항상 요구하지요. 조금씩 변형된 디자인들을 비교하고, 숙고하고, 질문하고, 선택하고, 다시 고치는 과정에서 눈과 손은 끊임없이 협력하게 됩니다. 이 훈련 과정을 최대한 돕기 위해 학교에서는 학생 모두에게 개인 책상과 작업 공간을 부여하며 흑백 프린트를 제한 없이 무료로 제공합니다. 그리고 모든 수업은 개별 논의를 기반으로 이뤄지며 학생과 선생님 간에 깊고 충분한 소통이 이뤄지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 스스로 확신을 얻게 되고, 결국은 모든 디자인 과정에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며 책임을 질 수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해요. 졸업 프로젝트는 학생의 성장을 확인할 좋은 기회이고요. 타이포그래피와 콘셉트 강의를 하는데, 수업 내용은 주로 어떤 것인가요?학사 과정 학생은 1학년 첫 두 학기 동안 다양한 기초 과목을 넓고 깊게 공부합니다. 2학년으로 올라올 때는 이 기초 경험을 바탕으로 시험을 거쳐 3가지 전공, 즉 타이포그래피, 이미지, 미디엄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저는 타이포그래피 전공의 첫 학기, 즉, 2학년 1학기 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다루는 내용은 긴 글을 바탕으로 한, 책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의 기초인데요. 제가 미리 선별한 글을 한 학기 동안 두 번에 걸쳐 책으로 만들게 됩니다. 일단 첫 단계에서는 엄격한 제약을 둡니다. 책의 최대 크기, 사용할 수 있는 글꼴의 수, 글자 크기에서부터 종이, 제본 방식에 이르기까지 제약을 두는 것이죠. 그 안에서 오로지 스스로 이해한 글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지, 그리고 독자에게 어떤 읽기 경험을 제공할지에 초점을 두고, 타이포그래피의 모든 세부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두 번째 과정에서는 똑같은 글을 제약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책으로 만듭니다. 첫 번째 과정을 통해 더 깊게 이해한 글과 그 디자인을 비평적으로 돌아보고, 보완, 수정할 부분이나 제약 때문에 실현하지 못한 부분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학생이 글이라는 재료를 깊이 이해하고, 디자인을 위한 결정을 내릴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할지, 소통의 도구로서 결과물을 어떻게 그려낼지 고민하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석사(MA, MDes) 과정에서는 두 가지 수업을 맡고 있어요. 타이포그래피(Tool Typography)와 콘셉트(Practice: Concept)라는 과목입니다. 타이포그래피 수업은 여전히 필립 슈탐 선생님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고요. 학생들은 empty – full과 같이 추상적이면서 상반되는 개념을 하나씩 골라 원, 선, 레터 등의 제한된 재료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한 학기 동안 진행합니다. 최대한 많은 변형을 정확한 의도로 만들어야 하고, 단계마다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다음 학기에는 선별한 그림들로 정해진 규격의 책자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독립적으로는 훌륭한 그림이라도 책이라는 입체적 구조 안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의 실험이 필요합니다.콘셉트 수업에서는 자신이나 주변인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아카이브를 인쇄 매체로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의도를 가지고 모아온 사물은 물론이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습관처럼 모인 것들, 기억의 모음, 감정의 모음 등 아카이브의 정의를 스스로 내리고, 그 영역을 창조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복잡한 면모를 어떻게 소통 가능한 형태로 소개할 것인지 콘셉트를 도출하고, 이를 책이나 포스터 등 인쇄 매체로 만들어 냅니다. 콘셉트는 디자인을 결정짓는 틀이 아니라 디자인 과정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실험적으로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커리큘럼의 특징이 궁금합니다.학사 과정 타이포그래피 전공의 경우, 무슨 학기에 어떤 내용을 다룰지를 세 선생님이 긴밀하게 협의해서 커리큘럼을 짭니다. 3학기에 제가 책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기본을 다루면, 4학기에는 그에 기반해서 좀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내용의 에디토리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궁극적으로 5학기에는 타입 디자인 수업을 진행하죠. 세부적으로는 전후 학기에서 다루는 내용을 참고해서 해당 학기 수업 내용을 조절합니다. 예를 들어, 제 수업에서는 일단 텍스트 기반의 타이포그래피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텍스트와 그림의 관계는 4학기의 에디토리얼 프로젝트에서 다룹니다. 반대로 4학기 담당 선생님은 3학기에서 어떤 내용을 다뤘는지 알기 때문에 텍스트의 난이도를 높인다든지, 아예 텍스트를 학생 스스로 고를 수 있도록 열어줄 수도 있죠. 그리고 중간과 최종 프레젠테이션 때는 세 선생님이 항상 같이 참석해서 다양한 시각의 피드백을 줌과 동시에 협의한 커리큘럼의 진행 상황도 서로 점검할 수 있어요. 이런 건강한 협업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학생은 연속성을 가지고 집을 짓듯 배워갈 수 있고, 선생님도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관찰하며 커리큘럼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할 때 무엇이 중요한가요?일단 글을 읽고 그 내용과 형태를 다각도에서 이해해 보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내용적 측면에서는 글 자체의 해석, 즉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는 어떤 관점이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서 타이포그래퍼로서 글을 이해하는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글을 이해하는 것은 타이포그래피의 모든 형태를 결정짓는 밑바탕이 됩니다. 형태적 측면에서는 좀 더 분석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문장의 길이는 어떤지, 문단과 단락의 구조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야기의 구조는 어떤지 등을 살펴봅니다. 학생들이 빡빡한 일정 중에 글을 세밀하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개별 논의를 통해 끊임없이 유도하는 편입니다. 같은 글을 두 번에 걸쳐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도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죠. 기술적으로는 공간에 대한 세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자 크기를 정하면 글자 사이 공간을 정해야 하고, 다음에는 낱말 사이 공간을 조절하죠. 이렇게 만들어진 글줄 하나에 확신이 생기면 글줄 사이 공간으로 넘어갑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 전체의 그림이 드러나면, 다시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로 들어오면서 역순으로 점검하죠. 결국 기본과 과정을 중시하는 학교의 철학이 여기에도 잘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거나 유학을 생각하는 학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한국의 은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아직 품고 있는 것이 있어요. 바로 배우는 사람의 자세는 한결같아야 한다는 것인데요, 개인적으로는 경북대학교에서 공부할 때와 바젤에서 공부할 때, 심지어는 가르치는 입장인 지금도 그 마음가짐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아요. 저는 ‘가르친다’는 표현을 쓸 때 매번 조심스러운데, 제게는 수업이란 결국은 학생과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고, 서로 배우는 과정이거든요. 제가 잘나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요. 그도 그럴 것이 매 학기가 끝나면 수업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이 정말 많음을 느껴요. 특히 요즘은 ‘무엇을’ 배울지보다는 ‘어떤 자세로’ 배울지를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무엇’, 즉 배울 대상은 너무 쉽게 접할 수 있어요. 인터넷이나 책에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훌륭한 예들도 넘치게 소개되어 있지요. 하지만, ‘어떤 자세로’ 배울지는 본인만의 의지와 직결된 부분이고,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자세가 한결같다면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원하는 바를 잘 이룰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해당 기사 전문은 CA MAGAZINE #244 <판을 바꾸는 그래픽 디자이너 15>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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