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핑을 못 해WE CAN'T SURF - <우린 서핑을 못 해>는 황은영이 비트볼 레코드에서 발매된 인디록 밴드 가나스의 앨범에 수록된 동명 곡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194 X 278mm사이즈, 28쪽의 그림책이다. 지난 4월 네덜란드 엑스트라풀에서 영문판 인쇄를 마친 이 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구상과 작업 <우린 서핑을 못 해>라는 노래를 듣고, 제목과 내용이 완전히 반대되는 서프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프 이미지를 찾아보고, 서프 음악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조금씩 스케치를 해보았고, 어느 날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서퍼들을 스케치했는데, 생각보다 서프 분위기가 잘 나오지 않아서,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식으로 스케치를 많이 했다. 서퍼 그림에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히면서부터는 파도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바다를 어떻게 그려야 시원한 파도 느낌이 날지 도무지 감을 잡기 어려운 상태가 계속됐다. 서퍼와 파도를 그려서 서프 문화의 에너지를 표현하겠다는 생각에 갇혀서 많이 헤매다가 다시 음악으로 돌아가, 색을 파란색 한 가지로 바꾸고, 그림 배열과 구성을 달리해 책에 리듬감을 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랬는데도 전혀 서프 느낌이 나지 않았다. 답답함 속에서 그리기를 관두고, 한동안 서프 음악을 아주 많이 들었다. 바다와 서프, 여름 자체가 매우 강렬하기 때문에 강한 원색 위주로 색을 썼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강렬해지지 않았다. 강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은, 어느 날 자메이카 음악 관련 전시를 보고난 뒤였다. 강렬한 사운드나 색감이 없는데도 엄청나게 여름 느낌이 났다. 색에서 좀 더 힘을 빼게 되었다. 거의 완성될 무렵에는 파리에 살고 있었고, 여름이었는데, 강렬한 햇빛이 반사되어 들어와 방에 붙여놓은 그림들에 비치고, 흰 벽끼리 그 빛을 튕겨내서 마치 햇볕 내리쬐는 해변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스케이트 보더들이 많이 지나다녔는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같이 들렸다. 그리고 서프 음악을 틀었다. 서프 기타를 신나게 연주하는 것, 서핑을 하는 것이 책 속으로 같이 들어갔다. 그런 것들이 마무리 단계에서 매우 많은 영감을 주었다. 작업 과정 - 인쇄 방식 결정 이 책은 특히 색이 매우 중요한 표현 요소였기에 정말 색을 잘 나오게 할만한 인쇄 방식을 많이 고민했다. 마침 워크 홀리데이라는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공모 형식으로 바꾸는 시기였고, 내가 첫 작가로 선정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우리나라로 돌아와 있었기에, 네덜란드로 일주일 동안 인쇄를 하기 위해서 갔고,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영문판의 책 표지 작업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 했다. 서퍼 대신 기타 그림을 쓴 결정이 지금도 무척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서핑 그 자체보다는 서프, 해변, 여름, 음악, 그래픽, 거리 문화 등 여러 요소를 녹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문 제목 글꼴은 기타 스트링 느낌을 내기 위해 직접 만들었고, 록킹하면서도 서프 문화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인쇄와 제책엑스트라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인쇄 전문 스태프들과 일주일 동안 생활하며 책을 찍는다고 하는 사실만 안 채 네덜란드로 갔고, 붉은 건물 꼭대기의 매우 귀여운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후에 들은 바로, 엑스트라풀은 80년대부터 암스테르담 근교 네이메헌에서 사운드, 아트, 프린트를 아울러 활동하는 집단이자 출판사, 인쇄소, 아트 스페이스다. 그중 인쇄 파트가 크누스트 프레스다. 얀데릭(엑스트라풀 수장)을 비롯한 몇몇 스콰터는 펑크 움직임 속에서 건물을 점거해 여러 문화 활동을 펼쳤고, 후에 정식으로 지금의 엑스트라풀에 정착하게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책 발표가 있었는데, 간단한 프레젠테이션 뒤 아스나ASUNA라는 일본 사운드 아티스트의 공연이 뒤를 이었다. 유쾌하게 마무리한 다음 날, 나는 네이메헌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홀연히 엑스트라풀을 떠났다. 결과<우린 서핑을 못 해> 영문판은 한국의 한 밴드 음악으로부터 시작해 프랑스에서 구체화하고, 네덜란드에서 인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여러 다른 장소의 감각들, 그리고 나의 손과 많은 사람의 손을 느리게 거쳐 이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 완성한 책이다. 순간, 장소, 감각이 한 권의 책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만나고 얽혀, 여러 손을 통해 종이라는 물질 위에 구현되고, 독자의 손까지 전해지는 과정의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에는 기타 치는 손, 요리를 만드는 손, 인쇄하는 손까지 담겨 있을 것이다. 아날로그적이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로 조금씩 나아가는 모든 손의 콜라보레이션, 그것이 이 책 속에 있다.이번 영문판 <We Can’t Surf>는 엑스트라풀에서 일주일 동안 인쇄하기 위해 페이지 수를 줄여 이미지만 있는 책으로 제작했다. 머지않아 나올 한글판은 한글 노랫말을 포함해 더 많은 이미지를 담은 책이 될 것이다. 이 기사의 전문은 2018년 7-8월호 : '여름과 디자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